잠상

최윤정 | 전시기간 : 2016-05-11 - 2016-05-31

 북촌유정의 4주년을 기념하여 최윤정 작가의 초대전을 연다오랫동안 문인((文人)으로 활동해 온 최윤정 작가가 화가로서 새로운 문을 여는 전시이다. 작가는 삶의 기억과 내면의 문을  글이라는 논리적인 매체에서, 미술이라는 낯설고 직관적인 매체로 자신을 새롭게 드러낸다. 그것은 구멍 난 옷에 바느질하듯 필요에 의한 시작이었을지 모르지만 이질적 표현방식에 대한 끌림은 시간이 흐르면서 지속적으로 누적되어 작품에 강렬하게 발현된다.

 

최윤정 작가의 작업실은 출판사 2층에 자리하고 있다작업실에 찾아갔을 때 그녀의 온화한 인상과 달리 작품의 첫 인상은 매우 진했다. 귀가해서도 오랜 시간 졸인 농축액 같은 깊은 여운이 남았다. 작가는 한 작품에 소요되는 시간이 해를 훌쩍 넘기도 한다며 태연하게 말한다. 그 긴 시간을 머금고 있는 작품은 화면에 고스란히 전해진 듯하다.  

 

그녀는 작업실에 비치되어 있던 원고나 한지 등을 찢어 투명 미디엄(본드성질의 미술재료)으로 캔버스에 붙여 텍스쳐를 만들어간다. 자필로 쓴 원고의 낱말과 글의 이야기는 지워지고 캔버스에 새로운 흔적으로 남겨진다. 원고와 한지를 겹겹이 붙인 흔적들은 마치 오랜 시간 창고에 쌓인 먼지를 압착해 고정한 것 같았다. 먼지처럼 가볍고 유연한 성질과 견고한 서로 다른 성질들이 섞이고 얽혀 미스터리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그녀가 화면 안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 내면과 마주했는지를 상상하게 되면 이루 말할 수 없는 강렬함을 느끼게 된다.

 

그녀의 화면에는 꾸준한 기억과 시간의 흐름이 담겨 있다. 형체가 드러나지 않는 그림 속에서 발견되는 것은 우연적 순간의 미를 추구한다기 보다 내면과의 지속적인 탐구가 더욱 엿보인다. 한지 결로 스친 순간이나 기억을 흘려보내지 않으려는 의지가 담겨있다. 그 지속된 시간의 반복적 행위가 고스란히 화면에 표현되어 있는 듯 했다. 그녀의 투명한 미소 속, 흔들림 없어 보이는 느낌은 이러한 작품과도 매우 닮아 있었다. 소녀같이 순수하고 여린 내면은 순백의 반투명하고 가벼운 한지 결로 투영되어 화면에 올려졌고, 시간이 흐르면서 현실 속 삶의 순간들은 화면에 켜켜이 쌓여 새로운 형태로 옮겨졌다. 이 순간은 하나의 형상이나 생각을 구현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삶을 투영하는 무한의 공간이다. 현실에서의 갈등, 두려움과 마주하고 있는 무엇이든 그 속에서의 내면의 의지, 소망하고 갈망하는 또 다른 자아들은 화면 안에서 마주한다.

 

그녀는 미를 추구하거나 아름다움을 좇는 목표로서 작품에 임하기보다 자신을 투영하는 도구로서 미술을 마주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그 작품은 삶의 무게와 순수하고 진실하게 마주했을 것이다. 미술이란 현실을 투영하는 예술적 도구이다. 그녀의 작품은 시간을 머금고 기억의 단초들을 찾아 삶을 투영한다. 현실과의 진실한 독백이 작업실 밖으로 나와 타인과 마주할 땐 큰 두려움을 가졌을 것이다. 그 용기를 갖고 세상 밖으로 나온 그녀 작업은 강렬하고 아름답다.       

 

글 이수연